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자파힛 제국 (문단 편집) === 건국 과정 === 1222년 건국된 [[싱하사리 왕국]]은 다른 자바계 왕조들에 비해서도 상당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특히 몇 백여년 간 이어져내려온 [[수마트라섬]]의 왕조들과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데, 크르타나가라(크르타느가라) 왕 치하에서는 수마트라를 침공하는 '말라유 원정'을 펼쳐 수마트라 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다르마스라야 왕국([[스리위자야]] 왕국의 후계 세력)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켜놓기까지 했다. 팽팽하게 이어진 자바와 수마트라 사이의 세력 경쟁에서 무게추를 압도적으로 기울여놓는데 성공했던 것. 1284년에는 [[발리섬|발리]]를 정벌해 발리의 여왕을 자바로 압송하였으며, [[순다 왕국]], [[보르네오]], [[말루쿠 제도]] 등 수많은 지역에 원정대를 보내거나 사절을 파견했다.[* 이때 싱하사리 왕국이 외교 반경은 굉장히 넓은 편이었다. 심지어 바다 저멀리 [[베트남]]의 [[참파]]와 동맹을 맺는 등 활발한 외교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싱하사리 왕국은 명군 크르타나가라 아래에서 인도네시아 군도 각지로 팽창 정책을 펼치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북쪽에서는 세계 최강국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보낸 [[몽골]]군이 무서운 속도로 기세를 올리며 아시아를 무자비하게 정복하고 있을 때였다. 쿠빌라이 칸은 싱하사리 왕국도 원나라의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기 위해 맹기(孟琪)라는 관리를 보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크르타나가라 왕은 쿠빌라이를 모욕하기 위해 맹기의 얼굴을 달군 쇠로 지지고, 도둑에게 내리는 형벌처럼 귀를 자른 후 쫓아내 버렸다. 격노한 쿠빌라이 칸은 대부분 남송인으로 구성된 30,000명의 병사와 1,000척의 함선, 1년 치의 보급품을 준비하며 거대한 규모의 원정을 준비했다. 하지만 1291년, 싱하사리 왕국의 크디리 영주 자야캇왕[* 자야캇왕의 'Jayakatwang'에서 'wang'은 고유명사의 일부로 [[왕]]을 의미하는 그 '王'이 아니다.]이 크르타나가라에게 반란을 일으켜 크디리 왕국[* 이를 앞서 나온 크디리 왕국과 구별하기 위해 '후 크디리 왕국', '제2차 크디리 왕국', 또는 '글랑글랑 왕국'(Kerajaan Gelang-gelang)이라고 한다.]을 세웠다. 이에 크르타나가라의 사위[* 크르타나가라 왕은 아들이 없었고, 왕의 막내 공주 가야트리 라자파트니(Gayatri Rajapatni)가 라덴 위자야와 결혼했다. 가야트리 라자파트니 소생의 공주 [[트리부와나]]는 나중에 마자파힛 제국의 제3대 군주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자바에서 가야트리 라자파트니는 미와 지혜를 갖춘 여성의 전형으로 칭송받았다.] 라덴 위자야는 북쪽에서 쳐들어온 크디리 군대를 격파했으나 남쪽 방면에서 기습해 온 자야캇왕이 무방비 상태였던 수도 쿠타라자에 입성하면서 라덴 위자야의 승리도 무위로 돌아갔다. 크르타나가라 왕은 자야캇왕에게 살해당했고, 자야캇왕은 싱하사리 귀족들의 불만을 억누른 채로 왕좌에 올랐다. 자야캇왕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목숨이 간당간당해진 라덴 위자야는 마두라섬 동부 수므늡 지역의 지배자였던 아랴 위라라자(Arya Wiraraja) 공의 도움을 받아 마두라섬으로 겨우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목재 자원이 풍부했던 자바 동부 타릭 지역을 지배하게 된 라덴 위자야는 숲을 개간하고 도시를 세웠는데, 지역의 '마자'라는 과일이 쓴 맛을 냈다고 해서 이름을 '쓴 마자', 즉 '''마자파힛'''이라 짓게 되었다. 바로 이곳이 훗날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강국이 되는 마자파힛 제국의 수도 마자파힛, 즉 현대의 트로울란(Trowulan)이었다. [[파일:Fleet_of_Kublai_Khan.jpg|width=500]] [[인도네시아]] 열도를 지나는 [[쿠빌라이 칸]]의 대함대. 이후 자야캇왕은 라덴 위자야를 사면했고, 라덴 위자야는 일시적으로나마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척을 했다. 한편 당대 최강국 원나라는 일개 동남아 국가가 왕조 교체가 되든 말든 착실히 자바 원정을 준비했다. 한•몽 혼성의 20,000명의 군대와 1,000척의 군함을 이끌고 취안저우를 출발한 원나라 함대는 베트남과 참파의 해안을 따라 무서운 기세로 남진해오면서 말레이 반도를 지났다. 여러 지역의 군주들은 몽골 군대의 위세에 겁을 먹어 조공을 바치고 복속했으며, 몽골군은 [[다루가치]]들을 남기며 마침내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자바섬까지 근접했다. 자야캇왕 왕에게 도전했으나 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던 라덴 위자야가 몽골 해군의 접근 소식을 들은 것이 이때였다. 복속하는 것을 대가로 몽골 제국군과 동맹을 맺은 라덴 위자야는 자야캇왕 왕을 쳐부수기 위해 군세를 모으고 몽골군에게 자바의 지도를 넘기는 등 적극 협조했다. 격전의 날에 라덴 위자야군을 선제공격하려던 자야캇왕 왕의 군대는 강력한 몽골군이 대대적인 침공을 가하면서 속수무책으로 패배했다. 몽골-라덴 위자야 연합군은 다하 전투에서 30,000명의 군세로 100,000명에 달하던 자야캇왕 왕의 군대를 분쇄했고, 2,000명이 훨씬 넘는 수를 사살하고 익사시켰다. 자야캇왕 왕은 자신의 궁전으로 도망쳤으나 몽골군에게 생포되고 말았다. 승리를 거두자 라덴 위자야는 조공을 준비하겠다는 명목으로 마자파힛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을 요청했다. 원나라 장군 시비와 원나라 군대에 복무했던 위구르인 장군 예케 메세는 라덴 위자야가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했으나 유독 중국 한족 장군 고흥(高興)만은 이에 반대하고 다른 둘에게 경고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이 경고는 사실이 되었다.]] 두 명의 장군이 이끄는 200명의 최정예 병사는 라덴 위자야의 초청에 따라 조공을 받기 위해 비무장 상태로 마자파힛으로 왔다. 기회만 노리고 있던 라덴 위자야는 '''몽골의 뒤통수를 치고''' 호송대를 공격해 무찔렀고, 나아가 기습공격으로 몽골군 본대마저 패퇴시켰다. 정예 군인이 3,000명 이상 숨진 사건이었기에 [[원나라]]는 극도로 분노했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결국 군인과 전리품을 수습해 퇴각했다. 원나라 군대도, 싱하사리 왕국도 사라지자 라덴 위자야는 이 권력 공백을 틈타 자바에서 세력을 넓혀 1293년 마자파힛을 수도로 하는 자신의 왕국을 세웠다. 이것이 점차 발전하여 마자파힛 제국이 되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